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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일반
  • 기자명 김현수 기자

[단독] “가습기 살균제 판결, ‘무죄’ 나올 수밖에 없었다”

  • 입력 2021.04.15 01:23
  • 수정 2021.10.30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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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소장 피해자 98명 중 94명이 옥시와 중복사용자
SK, 애경, 이마트 살균제 단독사용 피해자는 단 4명뿐
‘내 몸이 증거다’, 공소장 피해자 명단에도 없어 판단 대상 안돼

 

가습기 살균제 참사로 업무상 과실치사 등 혐의로 기소된 홍지호 전 SK케미칼 대표와 안용찬 전 애경산업 대표가 1심에서 무죄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취재결과 드러났다.

기존에 유죄 판결을 받은 옥시 제품과 마찬가지로 SK, 애경, 이마트 가습기살균제의 경우도 천여 명 이상의 피해자를 발생시켰다고 알려져 있지만, 판결문에 따르면 정작 검사가 공소를 제기하면서 피해자 명단에 올린 사람은 98명뿐이고, 그 중에서도 94명이 옥시 제품과 중복사용자이며, 단독사용자는 불과 4명인 것으로 확인됐다. 공소시효가 지난 사람까지 포함하더라도 11명에 불과했다.

따라서 법조계는 재판에서 무죄가 선고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은, 4명만으로 인과관계를 인정하기에 부족했고, 이를 보완하기 위한 수년간에 걸친 여러 차례 동물실험 결과도 폐질환을 일으킨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피해자 98명 중 94명이 옥시 제품과 중복 사용자인데, 기존 실험 결과에 의하면 옥시 제품이 훨씬 위해성이 큰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94명의 경우 폐질환과의 인과관계를 인정하는데 옥시제품이 오히려 개입요인이 되었다. 결국 단독 사용 피해자의 피해 입증이 중요한데 공소장에 포함된 피해자가 4명(공소시효 지난 사람까지 포함해도 11명)에 불과하고 그들만으로는 일반적인 인과관계를 인정하기에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보충적으로 행해지는 동물실험 결과가 오히려 주요한 쟁점이 되었는데, 수년간에 걸친 여러 차례의 실험에도 불구하고 당해 폐질환을 일으킨다는 점이 증명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난 1월 13일, 1심 선고 이후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이 SK케미칼, 애경산업에 사죄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환경운동연합]

한편 지난 1월 12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는 가습기 살균제를 판매해 소비자들을 사망 또는 상해에 이르게 한 혐의로 기소된 홍 전 대표와 안 전 대표 등 13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은 항소 의사를 밝혔고, 항소심 첫 재판은 다음 달 18일 열린다.

1심 재판부는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어마어마한 피해가 발생한 사회적 참사로 안타깝지만 기존에 유죄판결을 받은 옥시 제품과 달리 이번 제품은 검사가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원료 성분이 피해로 이어졌다는 인과관계가 입증되지 않았다고 무죄판결의 이유를 밝혔다.

지난 3월 26일 기준 가습기 살균제 피해구제 신청자는 7380명, 이 중 사망자 1647명, 정부가 인정한 지원대상자는 4168명이다. 하지만 이 수치는 이미 유죄가 확정된 옥시 제품 사용자를 포함한 전체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를 말한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의 대부분이 옥시 제품의 피해자이고 SK케미칼, 애경, 이마트 제품의 피해자 수는 일부에 불과했다. 따라서 검찰은 그 피해자 중에서도 피해판정위원회에서 1,2등급을 부여한,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피해 가능성 50% 이상의 피해자들만을 공소장의 피해자 명단에 올렸고 그 숫자가 98명 이었다.

검찰이 피해자 수를 지나치게 줄여 기소한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지만, 의사들이 피해 가능성 50% 이하라고 판단한 3,4 등급 판정을 받은 이들을 피해자 명단에 포함시키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것이 법조계 관계자들의 일치된 의견이다.

피해등급 판정은 ‘등급판정 가이드라인’을 기준으로 구제위원회에서 판정한다.

등급판정 가이드라인 제정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진 백도명 교수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저는) 1차 판정을 2013~4년간 맡아 진행하며 전체 판정의 틀(등급판정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역할을 했고, 이렇게 만들어진 판정의 틀이 아직도 사용되고 있다"라며 "(다만)그 이후에는 판정에 직접 관여한 적이 없다"라고 설명했다.

백 교수는 이어 "(피해 판정 대신) 구제위원회에서 판정에 따른 보상의 기준을 만드는 작업을 하여 천식 보상 기준을 만드는 작업을 했다"며 "1차 판정에서 판정기준과 틀을 만들고 직접 피해자들을 만나 판정하는 작업을 한 이후에는 직접 판정 자체를 하지는 않았다"고 덧붙였다.

한편, 본지 취재 결과 ”내 몸이 증거다“라고 주장하는 조순미씨, 기자회견이나 시위에 적극 참여하고 있는 김태종씨의 아내 박영숙씨 등은 모두 이 사건 공소장의 피해자 명단에 없었다. 이들은 판결이 잘못되었다고 강력히 호소하고 있지만, 정작 재판부의 판단 대상 자체 조차 되지못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검사가 기소한 ‘2019년 2월까지 가능성 50% 이상인 1,2등급 피해자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공소시효가 경과된 피해자,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질병으로 인정된 폐질환, 천식 외 증상의 피해자 등은 공소장의 피해자 명단에 포함되지 못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이 사건 피해자 4명은 사망 1명, 중증 2명, 천식 1명이었으며, 중증 피해자는 피해등급이고, 기소 여부는 가능성 등급으로 이뤄졌다. 즉 가능성 등급을 1,2,3,4 등급으로 하여 2등급이 50% 이상인데, 그 이상에 해당하는 사람이 98명이었기 때문에 그 수만큼만 기소한 것이다.

또한 앞서 옥시 유죄 판결의 결정적 근거가 됐던 동물 실험에서 재판부가 인정할만한 유의미한 결과가 나오지 않은 것도 무죄 판결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동물 실험의 결과에 대해 재판 당시 증인으로 나섰던 전문가들 역시 CMIT, MIT와 폐섬유화의 인과관계를 명확히 입증되었다고 진술하지 못했다.

이 같은 결과는 옥시와 애경, SK케미칼 제품의 성분 차이 때문이다.

옥시의 경우 제품에 포함된 PHMG(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 PGH(염화에톡시에틸구아니딘) 성분이 동물흡입시험에서 '폐섬유화' 증상이 입증됐다. 해당 재판부도 이를 받아들여 유죄 판결의 근거로 삼았다.

하지만 애경과 SK케미칼 제품에 포함된 CMIT(클로로메틸아이소티아졸리논), MIT(메틸아이소티아졸리논) 성분으로 같은 동물흡입시험을 한 결과 '폐섬유화'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농도를 권장사용량의 277배에서 833배까지 높여가며 10여 차례 실험을 진행했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시험 결과에 대한 재판부의 판단에 검찰과 피해자들을 비롯한 시민단체들은 유감을 나타냈지만, 유죄 판결로 피고를 감옥에 보낼 수 있는 형사 재판에서 인과관계가 확실히 증명되지 않은 결과를 유죄 판단의 근거로 삼기는 어렵다는 것이 법조계의 의견이다.

일각에서는 환경부의 피해판정에 참여하고 인과 관계를 입증하지 못한 실험을 하고 법정에서 증언한 이들이, 피해자들을 대변하고 집회 시위에 참여해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피해를 호소하며 책임자들에 대한 형사 처벌을 요구하는 현장에 자주 참석 하는 것은 앞뒤가 안맞다는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소비자단체 A씨는 “공권력을 직접 행사해 피해자 여부와 피해등급을 판정한 사람들이 시민단체에서 피해자 대변 역할을 하는 것은 안 맞다”라며 “세금으로 행해진 실험과 피해 판정의 증거 가치를 인정하지 못한다고 시위하기 보다는, 적어도 재판에서 (원료 성분이 피해를 줬다는) 인과 관계가 명확하다고 입증했으면 재판결과는 달라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백도명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교수와 박동욱 한국방송통신대 보건환경학과 교수는 각각 시민단체 환경보건시민센터의 대표와 운영위원으로 활동하며 가습기 살균제 피해 집회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위원장 최영애)는 지난 2020년 12월 10일, 유엔 세계인권선언 72돌을 맞아 개최한 기념식에서 ‘2020년 대한민국 인권상’의 최고상인 홍조근정훈장을 백도명 교수에게 수여했다. 인권위는 “가습기 살균제와 폐 손상 인과관계를 밝혀내고, 반도체 노동자들의 직업병, 원전 방사능 피해, 라돈침대 건강영향조사 등 다양한 환경 분야에서 사회적 약자 편에서 진실을 규명하며 국가 배상을 끌어내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여 피해자 인권 보호에 기여했다”고 수상자 선정 이유를 밝혔다.

한편, 서울고등법원 형사2부(재판장 윤승은)는 다음달 18일 홍지호 전 SK케미칼 대표와 안용찬 전 애경산업 대표 등에 대한 항소심 첫 공판준비기일을 진행할 예정이다. 항소심에서는 검찰 측에서 어떠한 증거를 보완할지, 재판부는 이같은 논점을 어떻게 판단할지, 가습기 살균제 참사 피해자들과 국민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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