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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칼럼] 우리 곁의 최순실

불의는 은폐와 침묵을 먹고 살지만
정의는 참여와 합당한 분노로부터 비롯돼

취준생에게 가장 모욕적인 순간은 면접관들에게 핀잔을 당할 때도, 남들에게 백수라는 비웃음을 당할 때도 아니다. 채용과정에서 누가 봐도 자신에 비해 경쟁력이 없어 보였던 사람이 나 대신 합격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다. 4년 전 나도 취준생으로서 가장 모욕적인 순간을 경험했던 사람 중 하나였다


인사담당자로부터 논술성적이 가장 우수했다는 귀띔을 받기도 했고, 1차 토론면접도 수월하게 합격한터라 자신감은 컸다. ‘이번엔 합격할 수 있겠다라는 벅찬 기대감에 4차례의 전형을 거치며 누적된 피로감마저 가볍게만 느껴졌다.


걔네 집안이 좋잖아.” 불합격 통보를 받은 지 몇 달 뒤, 공교롭게도 내가 지원한 채용시험의 합격자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던 지인은 그의 합격 비결을 이렇게 풀이했다. 회사에 도움이 되는 인맥을 제공해줄 수 있는 그가 회사입장에선 더 매력적인 존재였을 거라는 얘기였다. 남들에 비해 뒤떨어지는 기본기쯤이야 입사해서 배우면 될 터였다. 지난 몇 달 동안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던 내가 무엇이 부족했을까라는 궁금증은 그렇게 허무하게 풀려버렸다.


내가 이러려고 그 회사에 지원했나하는 자괴감보다도 괴로웠던 것은 부당한 현실을 받아들이란 주위의 조언이었다. 어떤 회사에서 4명의 신입을 뽑을 때 4등 안에 안착할 정도의 실력이라면 불합격이지만, 1등을 하면 합격할 수 있다고. 내세울 것 없는 이들이 살 길은 오로지 ‘1이 되는 것뿐, 그냥 우수한 실력으론 미흡의 배경을 이길 수 없다는 가혹한 충고가 잇따랐다. 실력 외의 요인으로 누군가가 시상대에 오르는 것을 불공평한 게임이라 말하는 것은 1등을 하지 못한 보통 루저열폭으로만 치부됐다. 왜 우리는 1등이 아니면 인정받을 수 없는가


어쩌면 우리 사회는 그렇게 보통의 존재에게 1등만이 실력이라는 잘못된 상식을 강요하며 주위의 수많은 최순실들을 바꿀 수 없는 현실로 용인해왔는지도 모른다. 부당한 방법으로 각종 특혜를 챙겨온 당사자가 돈도 실력이야’, ‘니 부모를 원망해등과 같은 헛소리를 당당하게 할 수 있는 것은 그래서다.


차라리 그 시간에 공부를 더 해라. 그게 현실을 바꾸는데 더 도움이 되는 방법이다라는 말은 틀렸다. 이미 대부분의 2030세대들은 분노 대신 외면을, 참여 대신 공부를 택했고 지금도 30만 명에 달하는 청년들이 미흡의 배경이 통하지 않는 거의 유일한 채용인 공무원 시험에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있다


하지만 불공정한 게임에서 열세를 극복하고 승리를 거머쥐는 이들은 소수에 불과한데다, 무언가를 변화시킬 수 있는 위치가 되더라도 잃을 것이 너무나 많기에 또 다른 부당한 현실에 종속되고 만다. 결국 저항해야 할 때 저항하지 않고,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얘기다.


물론 불평만 늘어놓는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진 않는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선 그에 상응하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것도 맞다. 하지만 우리 중의 누군가가 출발선에 서게 될지 모르는 게임에서 부정행위가 서슴없이 행해지고 이를 게임의 법칙인양 묵인하는 상황이 이어진다면 실력으로 승부해야 하는 보통의 존재들은 더욱 가혹한 경쟁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


최순실 게이트가 지금까지의 각종 권력형 비리보다도 큰 폭발력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은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이 자신의 고유 권한을 사인에게 위임했다는 뇌관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정적으로 그에 불을 붙인 것은 부정입학과 엉터리 학사관리 특혜에 분노한 이대생들의 목소리였다. 불의는 은폐와 침묵을 먹고 살지만 정의는 참여와 합당한 분노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오늘도 우리 곁의 수많은 최순실들은 말해주고 있다.